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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퍼로 '치료 불가' 암세포만 골라 통째로 파괴...절반의 암에 있는 돌연변이 신호 잡아내 유전물질 잘라, 건강한 세포는 그대로 둬

크리스퍼로 암세포만 골라 파괴하는 새 기술이 공개됐다.
[한국정보기술신문] 유전자 가위로 불리는 크리스퍼(CRISPR)를 이용해, 암을 일으키는 돌연변이를 지닌 세포만 골라내 통째로 파괴하는 새로운 기술이 공개됐다. 미국 UC버클리·UC샌프란시스코(UCSF)·글래드스턴연구소가 함께 운영하는 혁신유전체학연구소(IGI)와 유타대학교·유타주립대학교 공동 연구진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을 6월 8일(현지시간)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게재했다. 연구진은 이 기술이 전체 암의 절반가량에서 발견되는 돌연변이를 표적으로 삼으며, 난소암·췌장암·비소세포폐암처럼 치료가 특히 어려운 일부 암에서는 그 비율이 70~90%에 이른다고 밝혔다.
크리스퍼는 세균이 바이러스의 침입에 맞서 그 유전물질을 잘라내며 스스로를 지키는 자연계의 방어 체계에서 따온 기술이다. 사람이 원하는 유전자 부위를 정확히 찾아 자를 수 있어 '유전자 가위'라 불린다. 이번 연구를 이끈 IGI 설립자 제니퍼 다우드나(Jennifer Doudna)는 크리스퍼의 기반 기술을 개발한 공로로 2020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인물로, 이번 논문의 공동저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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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plash 제공

절반의 암 뒤에 있는 'p53' 돌연변이

연구가 표적으로 삼은 것은 'p53'이라는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의 돌연변이다. p53은 세포 차원에서 암을 억제하는 '종양 억제 단백질'로, 세포가 암으로 변하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종양 억제 단백질이란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자라거나 암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아 주는 일종의 제동 장치다. 그런데 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제동 기능을 잃어, 암세포가 거침없이 자라게 된다.
논문의 제1저자인 다우드나 연구실의 박사후연구원 정쿤 정(Jingkun Zeng)은 이 돌연변이를 새로운 표적으로 주목했다. 연구진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쓰이는 암 치료제 대부분은 지나치게 활성화된 암 유전자의 작동을 억누르는 '억제제' 방식이다. 그러나 종양 억제 단백질은 정반대다. 돌연변이가 생기면 기능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무언가를 억누르는 방식으로는 손을 쓰기 어렵다.
p53의 역할은 1980년대 후반부터 알려져 있었고, 여러 암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데다 암을 일으키는 초기 단계의 돌연변이인 경우가 많아 오래전부터 유망한 치료 표적으로 꼽혀 왔다. p53에 생긴 돌연변이가 먼저 나타나면 그 뒤로 다른 돌연변이가 줄줄이 이어지며 암이 자라는 경우가 많아, 이 단계를 막을 수 있다면 암을 더 이른 시점에 다스릴 수 있다는 기대가 컸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시장에 나온 p53 표적 치료제는 단 하나도 없다. 종양 억제 단백질에는 작은 분자 약물이 열쇠처럼 들어맞을 '약물 결합 주머니'가 없는 데다, 망가진 p53을 약으로 되살린다 해도 제 기능을 회복시키기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약으로 다루기 어려운 암을 연구진은 '치료 불가(undruggable)' 암이라 부른다.

고치는 대신 '없앤다'...크리스퍼의 본래 역할로

연구진은 망가진 종양 억제 단백질을 되살리려는 기존 접근 대신, 발상을 뒤집었다. 암 특유의 돌연변이를 지닌 세포를 찾아내 아예 통째로 없애 버리는 방식이다. 정 연구원은 유전자 편집 분야가 대체로 유전자를 고치거나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춰 왔지만, 자신은 비정상 세포 자체를 정밀하고 안전하게 파괴하는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고 밝혔다.
이는 크리스퍼를 본래의 역할로 되돌리는 시도이기도 하다. 자연계에서 크리스퍼는 무언가를 고치는 도구가 아니라 잘라 없애는 방어 무기이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망가진 p53을 되살리는 대신, 특정 돌연변이를 지닌 세포를 찾아내는 크리스퍼의 능력과 잘라내는 능력을 결합해 그 세포만 골라 파괴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연구진은 '크리스퍼-카스12a2(CRISPR-Cas12a2)'라는 시스템을 개조했다. 이 시스템은 돌연변이가 일어난 암 유전자에서만 만들어지는 특정 RNA를 찾아내도록 설계됐다. RNA는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물질로, 세포가 어떤 유전자를 쓰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신호 역할을 한다. 카스12a2는 세균 안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가 스스로 죽어 감염 확산을 막는 '자폭 스위치'처럼 작동하는데, 연구진은 이 성질을 활용했다. 시스템이 세포 안에서 암의 신호를 감지하면 카스12a2 효소가 활성화돼 '염색질 분쇄(chromatin shredding)'를 일으킨다. 염색질은 세포 속 유전물질이 뭉쳐 있는 덩어리를 말하며, 이 효소가 그 안의 유전물질을 마구잡이로 잘라내면 결국 해당 세포는 죽음에 이른다. 돌연변이를 지닌 세포만 무너뜨리고 건강한 세포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한 글자 차이까지 가려내...건강한 세포는 멀쩡

이 기술이 실제로 쓰이려면 정밀해야 하고 정상 세포에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 연구진은 정확도를 확인하기 위해 건강한 세포와 암세포가 함께 들어 있는 포유류 세포 배양액에 이 시스템을 넣었다. 그 결과 시스템은 두 세포를 정확히 구분해, 특정 돌연변이 RNA가 있을 때만 염색질 분쇄와 세포 사멸을 일으켰다. 정상적인 형태의 유전자를 지닌 세포는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정 연구원은 두 세포가 유전 정보의 최소 단위인 '뉴클레오타이드' 단 하나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도 이를 가려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항암 화학요법이나 방사선치료가 사실상 건강한 세포까지 포함해 분열하는 모든 세포를 죽이는 것과 달리, 이 기술은 훨씬 정밀하다고 설명했다. 공동저자인 앨런 애시워스(Alan Ashworth) UCSF 헬렌딜러종합암센터 소장은 이 접근이 다양한 암에서 암세포를 찾아 제거하는 정밀 도구로 크리스퍼를 새롭게 활용한 사례이며, 그동안 약으로 다루지 못하던 여러 표적을 새로 열 수 있다고 평가했다.

새 돌연변이엔 '안내 RNA'만 바꾸면 돼

연구진은 이 기술의 가장 큰 장점으로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는 점을 꼽았다. 기존 크리스퍼 유전자 편집처럼, 표적을 바꾸고 싶으면 세포를 안내하는 '안내 RNA'만 새로 만들어 끼우면 된다는 것이다. 정 연구원은 암에서 새로운 돌연변이가 나타날 때마다 그 돌연변이를 찾아내는 안내 RNA를 손쉽게 만들어 효과를 시험할 수 있으며, 이는 작은 분자 약물이나 항체 치료제를 새로 개발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고 밝혔다.
다만 실제 치료로 이어지기까지는 넘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이번 성과는 세포 배양 단계에서 확인된 것으로, 사람 몸에 곧바로 쓸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정 연구원은 다른 크리스퍼 치료법과 마찬가지로 유전물질을 자르는 큰 효소를 표적 세포 구석구석까지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전달' 문제가 핵심 난제라고 설명했다. 그는 일부 암에서는 다른 치료법과 함께 쓰는 병용 요법이 유용할 수 있다고 보고 다음 단계를 구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발표는 연구 기관이 자체적으로 공개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만큼, 임상 적용 가능성과 안전성에 대한 외부의 독립적 검증은 앞으로 지켜봐야 할 대목으로 남는다.
한국정보기술신문 학제간융합분과 김수민 기자 news@kit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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