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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 세포도 기억할 수 있다" 뇌 없는 생명체의 놀라운 학습 능력 발견... 뉴욕대 연구진, 인간 신장세포서 기억 현상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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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보기술신문] 뇌가 없는 단일 세포도 경험을 기억하고 학습할 수 있다는 혁신적인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그동안 기억과 학습은 신경계가 있는 생물에서만 가능하다고 여겨졌지만, 이번 연구는 생명체의 기억 능력이 훨씬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신장세포에서 발견된 기억 패턴

뉴욕대학교 신경과학센터의 니콜라이 쿠쿠시킨(Nikolay Kukushkin) 연구진은 배양접시에서 자란 인간 신장세포가 일정한 간격으로 제공되는 화학 신호의 패턴을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지난해 말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발표했다. 이는 신경계 밖에서 처음 관찰된 기억 현상이다.

연구진은 신장세포와 미성숙 신경세포를 분리해 키우면서 cAMP 반응 요소(CRE)라는 DNA 서열을 이용해 세포 내부의 반응을 측정했다. 이 유전자가 활성화될 때마다 세포가 빛을 내도록 설계해 기억 형성 시점과 지속 시간을 관찰할 수 있었다.

간격 효과로 입증된 세포의 학습 능력

실험 결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3분간 지속적으로 화학 물질을 노출시킨 경우 세포는 몇 시간 동안만 빛을 냈지만, 같은 양의 화학 물질을 10분 간격으로 4번 나누어 제공하면 하루 이상 빛을 지속했다. 이는 모든 동물에서 나타나는 '간격 효과'와 동일한 패턴이다.

쿠쿠시킨 박사는 "세포 관점에서 경험이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화학 물질의 패턴"이라며 "간격을 둔 정보는 안정적이고 천천히 변화하는 환경의 증거이므로 더 오래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100년 전 발견된 단세포 학습의 재조명

이번 연구는 100년 전 허버트 스펜서 제닝스(Herbert Spencer Jennings)가 수행한 실험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기도 하다. 제닝스는 1906년 연못에서 채취한 단세포 생물 스텐토르 로젤리에 자극을 가했을 때 개체가 경험을 통해 반응 패턴을 바꾸는 것을 관찰했다.

하버드대학교의 제레미 구나와르데나(Jeremy Gunawardena) 교수팀은 2019년 제닝스의 실험을 정확히 재현해 단세포 생물이 실제로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로써 오랫동안 의심받았던 단세포 학습 연구가 복권됐다.

신경계 이전에 존재했던 원시 기억 시스템

하버드대학교 인지과학자 샘 거쉬만(Sam Gershman) 교수는 "기억은 뇌가 등장하기 수억 년 전부터 존재했던 모든 생명체에게 유용한 시스템"이라고 강조했다. 점균류는 먹이를 찾으면서 화학적 흔적을 남겨 다녀간 곳을 기억하고, 박테리아는 과거와 현재 조건을 비교하며 더 유리한 환경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고대 형태의 기억'이 신경계의 시냅스 가소성과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가설 하에 거쉬만 교수는 최근 단세포 생물인 스텐토르 코에룰레우스 연구를 위한 실험실을 추가로 구축했다.

행동 없이도 존재하는 기억의 재정의

기존 신경과학에서는 기억을 '경험 후 미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정의해왔다. 하지만 쿠쿠시킨 박사는 이런 행동 중심 정의가 자의적이라고 지적한다.

바다 달팽이 아플리시아의 예를 들면, 꼬리에 전기 충격을 가해 방어 반사가 강해지면 기억 형성으로 인정하지만, 같은 개체를 해부해 뉴런만 남겨놓으면 눈에 보이는 반응이 없어 '기억'이 아닌 '기억의 메커니즘' 또는 '기억의 유사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세포 차원에서 밝혀지는 기억의 본질

연구진은 기억을 물리적 사건, 즉 세상이나 자신에게 남겨진 흔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백신 접종도 일종의 기억이고, 상처나 책도 마찬가지라는 관점이다.

거쉬만 교수는 "생물학적 시스템은 정보를 보존하는 물리적 과정들을 진화시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활용한다"며 "뇌에서는 뉴런 간 신호 전달의 역학이 기억을 만들지만, 단일 세포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 척도의 분자들 간 역학이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과학계의 편견이 가린 세포 기억 연구

단세포 차원의 기억 연구가 오랫동안 외면받은 이유 중 하나는 사회학적 편견 때문이라고 구나와르데나 교수는 지적한다. 제닝스의 발견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향성론'에, 1960년대 베아트리스 겔버(Beatrice Gelber)의 짚신벌레 학습 실험은 행동주의 심리학에 반하는 결과였기 때문에 묵살됐다는 것이다.

이들 이론은 생명체를 미리 프로그래밍된 반응을 반복하는 생물학적 자동기계로 전제했기 때문에 학습하고 적응하는 세포는 모델에 맞지 않았다.

기억 정의를 둘러싼 용어의 문제

'기억'이라는 용어 자체가 불분명하고 다양하게 정의되는 점도 연구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컴퓨터과학자와 생물학자가 생각하는 기억의 의미가 다르고, 일반인들은 내성적 관점에서 기억을 이해한다.

쿠쿠시킨 박사는 "일반인들이 눈을 감고 어제를 떠올리는 것을 기억이라고 생각하지만, 과학에서 연구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라며 "우리가 연구하는 기억은 경험 후 변화된 반응성 자체"라고 명확히 했다.

세포가 아는 것은 생존을 위한 지혜

바버라 맥클린톡(Barbara McClintock) 노벨상 수상자가 1983년 던진 "세포는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제 더욱 명확해졌다. 세포가 자신에 대해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다.

세포는 언제 구부러져야 하고, 언제 싸워야 하며, 언제 도망쳐야 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에 대한 정보를 통합한다. 결국 세포는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정보를 보존하며,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50년간의 기억상실에서 깨어나는 과학계

현재 세포 기억 연구자들이 과거에 버려진 실험적 단서들을 재검토하면서 기억이 맥락에 얼마나 의존적인지, 과학의 사회적 환경이 어떤 아이디어를 보존하고 어떤 것을 잊게 만드는지 발견하고 있다.

쿠쿠시킨 박사는 "모든 종류의 단일 세포가 기억하고, 식물이 기억하며, 뉴런과 모든 종류의 세포가 같은 방식으로 기억한다는 것이 기본 가정이 되어야 한다"며 "기억이 연속적인 과정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마치 50년간의 기억상실증에서 깨어나듯 과학계에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있다. 다행히 기억은 홍수처럼 되돌아오고 있다.

한국정보기술신문 학제간융합분과 김수민 기자 news@kit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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